<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

2020년이라는 "새해"를 맞이하며 생각을 정리한 글.

새해라는 것이 뚜렷하기도 하지만 모호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요. 새해라고 그날이 유독 특별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글쎄요, 새해와 정반대로 가장 어중간하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어중간한 어느 주의 어느 화요일도 사실은 새해처럼 충만한 기운이 흐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과 시간을 조율하는 흥미진진한 ‘달력'이야기를 다룬 이정모 작가의 <달력과 권력>을 읽으며 궁금증과 저의 특유의 의구심/반항심/도대체 왜?/기타 등등 을 많이 해소하기도 했습니다.

김영민 작가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도입부에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라는 부분이 생각이 나서 공유를 해보려 합니다. 저에게는 깊게 와 닿기도 해서 필사를 해 두었던 부분입니다. 

“...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철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저의 목표이기도 하지만 모두의 목표이기도 할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는 "우리는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무시한다....... 삶은 그런 식으로 소진되며, 죽음은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다"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KBS에서 얼마 전에 방영한 한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이라 불리는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에 계시는 한 수도자는 자신이 3초 뒤에 죽는다 생각하면 용서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새해 첫날부터 죽음이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했지만, 부정적인 기운을 퍼뜨리려 그런 건 아닌 거 아시겠죠? 저는 2019년보다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단단해지며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2021년이 다가올 그쯤에 또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아쉬움에 후회하는 일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0.1 정도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마지막은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

2020.01.01

최민혜

https://brunch.co.kr/@minhyechoiart/8

태도가 작품이 될 때 - 박보나 지음 : When Attitudes Become Artwork

이 책의 제목은 1969년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이 기획한 전시 @ 스위스 <태도가 형식이 될 때>에서 가져온 것이다 라고 한다. 당시 그 전시는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미술작품”의 틀을 깨었고, 그 이후로 그는 1세대 독립 큐레이터로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분이시다.

내용은 비전공 분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추천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박보나 작가님을 향한 팬심으로 내용을 스포일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나의 마음...:)

고민이 생길 때 꺼내보고 만져보고 또 크기도 마음에 들어서 가방에 마치 부적처럼 들고 다니며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또 익숙함을 바라보는 태도를 새로이 되짚어 보며 작업을 해야겠다.

+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익숙하기도 했는데 바다출판사 홈페이지에 문학예술 쪽 책을 구경하다 보니 아서 단토의 <미를 욕보이다>도 같은 출판사였고, 비슷한 표지 디자인이었다. 이번 책은 주수현 님이 디자인하셨다고 책에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분이신지 궁금하다

++표지에 있는 작품은 Bas Jan Ader의 <I’m too sad to tell you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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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와 ‘알려주다’ 또는 ‘사유’와 ‘표현’ - John Berger, <Ways of Seeing>

예술인들에게는 어찌 보면 익숙한 비평가, 소설가이자 화가인 사람이 있다. 바로 존 버거 (John Berger)이다. 그는 런던 태생으로 미술평론가로 시작해 점차 영역을 넓혀 예술, 인문,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준 사람이다.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Ways of Seeing>이다. 어떤 자는 이 책을 자신의 예술 교과서라고도 부르기도 할 정도로 예술인들에게는 친숙한 책이다. 한국어 제목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이다. 내가 보유한 책은 원서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책은 존 버거, 스벤 블룸버그, 크리스 폭스, 마이클 딥, 그리고 리처드 홀리스가 비비시 (BBC) 텔레비전 시리즈 <Ways of Seeing>에 담겨있는 생각들을 확장시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총 7개의 번호로 매겨진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2, 4, 6 장은 이미지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어보았고, 그리고 주기적으로 한 번씩 다시 읽어본다. 나의 관심사도 크게는 해마다 작게는 날마다 바뀌는 판이니, 읽을 때마다 생경하다. 사실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글은, 어찌 보면 때로는 그야말로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의 글은 어렵지 않고 읽는 대상이 예술 전공자로 국한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니 난해한 전문용어들도 타 도서보다 적은 편이라 말할 수 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던 나로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어느 정도까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소화될지는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이 책의 끝에는 이미지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책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내용이 많다 -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이 많다. 그 내용들은 머리를 떠돌기도 하며, 무의식에 나타나기도 하며, 자기 전에 나타나기도 하는 것들이다. 그것의 옳고 틀림에 상관없이 우리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우리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드 넓고 인적이 드문 대자연에 가면 현기증이 오는 그런 인간이 되어가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는’것에 대한 관심사가 짙어지는 시기를 거치면서 전문성을 갖춘 정보들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지고 곱씹고 소화시키면서 우리는 더 ‘깊은 정보’ 속으로 향한다.

나에게는 - 그리고 존 버거에게도 - 예술이란 분야가 그렇다. 갤러리, 뮤지엄, 혹은 핸드폰 화면으로 보는 가공된 이미지들을 보는 순간에도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떠오르고 어느 순간 이미지를 해석하고 소화시킨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 또는 그렇다 믿고 있거나.

과외 아르바이트를 꽤 많이 해보았는데 가장 어려운 수업은 미취학 아동에게 2 + 2 가 왜 4 인지 설명하는 수업이었다. 나는 2와 2가 더해지면 4라는 걸 안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것은 항상 나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꽤 오랜 시간을 지내 왔던 것이다. 학생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과 아직 많이 찌푸려진 적이 없어서 주름이 없는 미간이 순간 나를 당황시켰다. 나는 연필 4자루를 2자루 2자루씩 나누어 설명을 해주었고, 학생은 그제야 2 + 2 = 4 임을 이해한 듯 보였다. ‘아 이런 게 눈높이 교육이라는 건가?’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생각이 사실 너무 뻔하고 뻔한데 새롭게 느껴졌다. 여담이지만 그 순간 나에게 진정한 ‘배움’을 준 선생님들의 얼굴이 많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존 버거에게도 <Ways of Seeing>을 써 나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녔을까? 그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던 내용’들을 끄집어내어서 남들이 ‘알 수 있게’ 표현했던 그의 길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그가 ‘사유’하고 있던 생각들을 글로 ‘표현’ 하였다. 작은 것도 간과하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 이 더 잘 와 닿았던 이유도 아마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을 완벽히 숙지한 상태로 쉽게 ‘알려줬기’ 때문이지 않을까....?

( +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나도 신나게 붓을 잡고 그리다가 작품이 마무리가 되어 갈 때쯤이면 무슨 그림이라고 설명해야 나의 의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줄까 라는 덫에 매 작품마다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말하고자 함이 무엇인지 머릿속을 뒤집어 헤치며 다니면서 알맞은 것을 찾으러 다닌다. 현기증과 답답함, 짜증 등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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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시대'와 우리의 감정 처리법 [KR version]


Keep In Touch Seoul 의 전시 <If Not, Not>

        미술관, 박물관, 그리고 갤러리에는 전시를 소개하는, 혹은 작품의 설명이 들어있는 글들이 있다. 예전엔 사심 없이 알고 싶어서 모으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기 시작하고 나선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떨진 모르겠지만) 의무적으로 집으로 가지고 온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펜으로 밑줄을 치며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까지 찾아보며 작품세계를 깊게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도 있지만, 나는 어떻게 써야 할까, 어떻게 읽힐까에 중점을 두고 좋은 점을 ‘훔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읽어본다. 

        글의 종류에는 작품과 작가의 생각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담백한 글, 감성을 자극하는 개인적인 글, 어려운 글, 재미없는 글 등이 있다. 세상에 나쁜 글은 없다. 재미없다는 게 그리고 어려운 게 나쁜 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방법으로 쓰인 글들이다. 전시 글이 좋다고 작품의 가치가 더 나아지지도, 작품이 좋다고 전시 글이 무의미 해지지도 않는다. 전시 글은 작가가 또는 기획자가가 제시하는 ‘보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리고 그 이하도 아니다.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미술이 어렵다고 느낄필요는 없다. 작품을 보고 어떠한 감정이나 생각을 조금이라도 공유했으면 성공한 관중이다.) 

키타이 (R.B Kitaj) 의 If Not, Not (1975-76) (Image is from Google)

키타이 (R.B Kitaj) 의 If Not, Not (1975-76) (Image is from Google)

6.24일까지 하는 킵 인터치 서울 (Keep in touch seoul)의 <If Not, Not>의 전시의 글은 소장해야 하는 파일에 들어갈 만큼 좋은 글이라서 공유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는 권세정, 노은주 그리고 최보련 작가의 전시이다. 공유하는 글을 쓴 샘 로빈슨 그리고 이연경 작가는 킵 인터치 서울을 운영하고 있다. 

샘 로빈슨의 작가서문 &lt;If Not, Not: Resignation and Resistant&gt;

샘 로빈슨의 작가서문 <If Not, Not: Resignation and Resistant>

        샘 로빈슨 작가의 글엔 키타이 (R.B. Kitaj)의 페인팅 (If not, not 1975-76)에서 가져온 전시 제목에 대한 설명과 예술의 잠재적인 사회적, 정치적 등의 영향력 그리고 그것이 작가와 작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술가들은 언제까지나 그 문제들을 제시하고 논의하고 그것에 대한 고민들을 다른 방법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로빈슨 작가의 글은 더 와 닿았다. 예술의 허무주의와 예술의 탄생에 곁들여진 “저항을 이루는 기본들”이 이 특정한 전시를 떠나서, 전반적인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설명해주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이연경 작가의 전시서문 &lt;감정에 대하여&gt;

이연경 작가의 전시서문 <감정에 대하여>

         이연경 작가의 전시서문 - 감정에 대하여 - 는 미술이라는 것을 뛰어넘어 모든 창작물과 넘쳐흐르는 미디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의견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게 되면 ‘쿨하지 못하다’, ‘감성 충이다’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싸이월드 시절 때부터 인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의견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엄청난 속도로 빨라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이다. 이 과열된 속도엔 다른이나 그리고 자신의 감정들이 조금은 무의미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바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하루에 소비하는 이미지와 글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어쩌면 미래의 ‘우리’는 미디어의 쓰레기 무덤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사회의 변화에 예술이란 분야는 발마 춰 걷고 있다고 말할 순 없다. 물론 기술을 이용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방식들이 녹아들어 있는 분야가 예술이다. 글이던 그림이던 모든 작가는 추상적인 조그마한 조각에서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당신이 이러한 방식을 인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 본다면, 당신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이연경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2018.06.03

최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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